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금치 전투 (문단 편집) == 결말 == 전투에서 승리한 관군-일본군은 우금치에 남아 있는 동학 농민군을 모두 패주시키면서 공주의 농민군을 제거하고 후비 보병 2중대장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 육군 보병[[대위]]가 인솔하는 관군 추격대 50명으로 하여금 전봉준을 추격하게 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논산으로 후퇴했지만 밤 사이 다수의 낙오 및 탈영병이 발생하여 겨우 50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의 주력 부대가 패하면서 우금치 전역의 농민군은 각개격파되어,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은 와해되고 만다. 이후 전봉준은 자신 휘하에 남아있던 농민군을 해산하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순창 피노리에 피신해 있던 도중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인해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가 피노리 주민이 투척한 몽둥이에 다리를 맞고 관군에게 붙잡혔고, 이듬해 4월에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 전봉준의 교수형은 갑오개혁으로 참수형이 금지된 조선에서의 교수형 최초 집행 사례가 되었다. 비록 이전에도 교수형은 존재했었으나 그 대상은 주로 여성이 대상이었다.] 남접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김개남]]은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그해 12월에 전라감사 이도재의 독단으로 참수당했다. 그리고 또 다른 지도자인 손화중 역시 관군에게 붙잡혀 전봉준, 최경선, 성두환, 김덕명과 같은 날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들 외의 농민군 생존자들은 1895년까지 관군과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하나둘 죽어가거나 체포되어 중형을 받거나 처형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